일제강점기 프랑스 한인사회
일제강점기 프랑스 한인사회
1919년 이전 대한민국과 프랑스
프랑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조선인은 민영익이다. 민영익은 명성왕후의 친정 조카로 1882년 보빙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친선사절로서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 아서 대통령까지 예방했던 민영익은 예방당시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4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프랑스에 방문해 프랑스 대통령을 예방했고, 이것이 프랑스와 한국의 첫 공식 관계이다. 이때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대통령을 향한 큰절은 파리 리옹역에서 한식 예복을 절도 당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심상학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5개국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했으나 부임하기전 조신희로 대체되었고, 조신희는 중국 당국의 억류로 홍콩에 2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했다. 1890년 박제순, 1897년에는 민영환이, 1898년에는 민영돈이 공사로 임명되었지만 국내 사정 등으로 아무도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다.
1899년 3월 비로서 이범진이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주재 겸임공사로 임명되어 1900년 4월 프랑스 대통령에게 신임장이 제정되었다.
1919년이후 프랑스에서 독립운동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각지로 퍼지고 중국 간도지역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던 시기 상해의 신한청년단 대표 김규식 등 4명이 파리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파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독립과 외교 활동을 위해 파리에 머물며 활동했으며 활동은 파리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4월 13일에 파리에 있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 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의 참가를 위해 임시정부가 빠르게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 위원부는 평화회의 내내 한국독립의 필요성, 임시정부의 수립과 조직 등을 알리며 평화회의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열강의 냉대와 일본의 방해로 계획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평화회의 끝난 후 이승만의 명령으로 김규식이 미국으로 소환된 이후 이관용이 위원장 대리를 맡고 황기환이 서기장으로 집무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파리 위원부에 보낸 문서에 'Republic of Korea' 국호를 썼고, 파리 위원부는 공식 외교문서에 ‘République de Corée'를 국호로 사용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프랑스 이주 노동자의 정착
1919년에는 한국 노동자들이 프랑스로 이주해온 시기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러시아 무르만스크 항에서 노동자로 있던 500여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프랑스에 데려오기 위해 황기환 서기장은 프랑스 노동부와 협상을 했고, 영국 에덴버러를 통해 입국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영국군의 보호를 받으며 에덴버러에 도착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200여명에 불과했다. 거기에 당시 프랑스의 동양인 노동자의 배척 분위기로 인해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노동자는 최종적으로 홍재하, 박병서 등 35명 뿐이었다. 35명의 이주 노동자들은 프랑스 스위프(Suippes)에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며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도왔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은 월 급여의 1/3에 해당하는 30프랑을 각출하고, 매달 1000프랑을 마련해 독립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해 유럽 각지의 한인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기념 행사를 마련했다. 이 날 행사에는 유럽 각지 5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했고, 애국가 제창을 비롯해 ‘삼일절 만세’, ‘국토 광복 만세’, ‘재법한국민회 만세’ 등을 제창하며 조국 독립의 뜨거운 열망을 토해냈다.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재법한국민회는 프랑스로 노동자들을 이주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나고 스위프 지역에서 노동하던 한국 노동자들이 환경이 더 나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 활동이 약화되었다. 1923년 홍재하는 재법한국민회를 재정비하여 ‘파리 한인 친목회’를 결성했다. 이후 한인 친목회는 프랑스 한인사회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동포와 프랑스 유학생들을 돕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920~30년대 유학생들
192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유학생들 틈에 21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중 9명은 독일로 9명은 미국으로 프랑스에 남은 유학생은 3명에 불과했다. 이 당시 프랑스에 도착한 대표적 유학생으로 정석해가 있다. 정석해는 1919년 연희전문 YMCA회장으로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각지에 배포하고,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해 본격적인 독립운동 전선에 투신했으며, 1920년 상해 유법검학회의 주선으로 12월 14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그는 1930년 수학과 과학사로 파리대학을 졸업했으며, 31년 이승만이 제네바에 체류할 당시 파리로 초청해 독립운동을 의논하기도 했다. 광복이후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61년 정년퇴임했다. 서영해도 정석해와 같은 배를 타고 프랑스에 도착한 유학생이다. 서영해는 3.1운동에 참여해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다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막내로 활동했다.
서영해는 제네바에 세워진 국제연맹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임시정부 요원들의 요구에 의해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이후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난 후 상해임시정부와 유학생 사이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1928년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를 오가며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활동했다.
1934년 6월 임시정부는 서영해를 주불 위원부 대표로 임명했고, 광복되던 해인 1945년 3월 주불 대사로 임명했다. 이승만과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서영해는 임시정부 인사인 김구, 조소앙과 남한에서 활동하다 김구의 암살 등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해로 피신했다. 프랑스로 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개석 정부가 무너지면서 프랑스행이 좌절되었고 국내로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 재불 한국 화가
1920년대 중 후반 프랑스를 방문했거나 유학했던 미술관련 예술인들은 한국의 서양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 시기 서양화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일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유학생들의 활약으로 일본의 영향 아래를 벗어 날 수 있었다.
대표적 인물로 이종우, 나혜석, 최린, 임용련 등이 있다. 특히, 임용련은 이중섭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졌다. 임용련은 1929년 미국 예일대 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함석헌, 조만식에 영향을 준 인물이다.
1930년 파리에 건너온 임용련은 백남순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 창씨 개명등이 요구되던 시기 서명에 한글 자모를 풀어쓰는 방식 등을 제자들에게 알려줬으며, 이중섭 화가의 서명이 ‘ㅈㅜㅇㅅㅓㅂ’인 것도 이 영향이다. 해방 전 프랑스를 다녀간 한국 화가들은 짧은 체류기간에도 불구하고 일본풍이 만연한 한국 서양화를 서구풍으로 변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에서 서양화의 선구자가 되어 서양화의 기반들 다졌다.
※ 자료출처 【유럽한인 100년의 발자취】, 유럽한인총연합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