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후 프랑스 한인사회
일제강점기 이후 프랑스 한인사회
해방 후 한인사회 흐름
해방직후 파리에는 10여명의 한인 교포가 거주하고 있었다. 해방과 함께 많은 프랑스 거주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0년대에서 80년대 프랑스 한인사회 구성의 특징은 70%이상이 유학생과 주재원이다. 주로 단기 체류자들로 국내 경제상황과 여행정책에 영향을 받는 구성원들이다.
1979년 해외 유학생에 대한 송금 자유화와 1983년 해외 유학 및 여행규제 완화로 이시기 프랑스 유학생이 급증하면서 1985년 5,000명 1989년에는 8,000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하지만 1997년 한국의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은 자영업자와 송금을 받지 못한 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했다. 이후 경제 회복으로 2019년 말 20,000여명의 교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 교민사회는 유학생이 많아 대학원 이상의 고학력자가 많다. 이들 유학생들은 인문학을 비롯한 예술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분야 창작활동과 대학교수, 연구직에 진출하고 있다.
구성원 특징 중 또 하나는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60~70%로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문학과 예술, 미용, 의상 등 주로 여성 진출이 용이한 분야에 유학생들이 많고 이들 여성들이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 사회에 정착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외 교민들의 경제구조는 주로 여행업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돼 있어 한국 경제상황에 영향을 받고 유학생들의 경제활동 역시 단기 취업에 머무르고 있는 취약한 구조다.
프랑스 한인사회의 태동
유학생 중심이던 한인사회는 1963년부터 프랑스 정부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면서 프랑스 유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당시 프랑스로 가기 위한 항공 노선은 도쿄에서 에어프랑스를 이용해 파리로 입국하는 방법이었으나, 1973년 대한항공의 첫 취항으로 교류와 이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1963년 유학생이 대부분인 교민사회에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프랑스 한인 학생회】가 결성되는 데 이것이 【재불 한인회】의 초석이 된다.
그리고 이후 1968년 드디어 【재불 한인회】가 ‘한묵’을 회장으로 발족해 50년만에 【재법한국민회】 적통을 이어받게 된다.
경제적 구조가 취약한 한인사회가 한인회를 이끌어 가며 많은 활동적 제약이 있어왔지만 1995년 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될 한인회 사무실이 마련된다. 파리 15구 Croix Nivort에 마련된 한인회관을 중심으로 교민들의 정보제공 및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파리 15구 지역에 한인들 거주 비중이 높다.
현재 한인회는 【프랑스 한인회】를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35대 나상원 회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한글학교
우리 민족은 어느 곳을 가나 민족정신을 키워내기 위해 학교부터 세워왔다. 척박한 간도에도 러시아 연해주에도 하와이, 남미에도 이주한 우리 민족은 학교를 세워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다. 1974년 파리 한인성당에 처음으로 재불 한국인 학교를 세웠다. 프랑스에 한국 교민들이 늘어나면서 자녀들이 성장하는 동안 모국어를 잊어버리는 것에 아타까움을 느낀 몇몇 학부모들이 1971년 파리 한인성당에 모여 한인 아이들을 위한 한글학교 개설을 주창한다.
이후 73년 오경동 신부의 노력으로 카톨릭 파리 교구청 상서국의 학교설립 허가를 받았고, 74년 5월 6일 프랑스 교육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개교하게 된다. 당시 학생수 38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79년 입양인을 위한 나비반을 신설해 입양인들의 한글교육에도 앞장섰다.
학생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파리 한글학교는 늘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재불 한인음악가인 백건우와 강동석이 유네스코 대강당에서 자선음악회를 통해 124,000프랑을 모금했고, 91년 재불 화가들이 나서 자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인들과 한인사회의 노력으로 파리 한글학교는 2018년 말 기준으로 총 250여명의 학생들이 유치부, 초등부, 어학당, 중등부 등 21개 반으로 확대되어 운영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한류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프랑스인들이 늘면서 지방 한글학교의 경우 70%가 외국인인 경우도 있는 등 한글학교에 점차 외국인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의 한국 입양인들
프랑스는 미국 다음으로 한국 아동을 많이 입양한 국가이다. 1969년 테르 데 좀므(Terre des hommes)와 홀트재단이 협약을 맺어 한국 여아 두명 입양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833명의 아이들이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고, 2009년까지 11,230명의 한국 아동들이 입양되었다.
프랑스에 입양되어 프랑스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입양 프랑스인들은 이제 장년이 되어 프랑스 주류사회에도 상당히 진출해 있다.
대표적으로 2011년 유럽 환경당 당수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장-뱅상 플라세(1968년 서울출생)와 문화부 장관까지 오른 한국 입양인 플뢰르펠르랭,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현재 마크롱정부에 합류한 조아킴 송-포르제 등이 있다.
프랑스 입양인들은 1995년 2월 가족 친지들간의 교류를 위해 【한국뿌리협회】를 발족시키고, 입양인들의 간 교류를 통해 한국어, 한국 전통 문화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협회는 한국 방문 등을 함께 하고 해외 입양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프랑스 한인 종교단체
프랑스에서 한인 종교단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개신교, 불교가 주류로 뿌리 내려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주교는 오랜 역사속에서 뿌리내린 종교이다. 1954년 파리교구청으로 인정받아 이영식 히지노 신부를 중심으로 ‘미시옹 카톨릭드 코레’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1960년 로마에서 있었던 재유럽 한인 카톨릭 학생들의 피정에 27명의 프랑스 거주 신학생 및 유학생이 참석했으며, 재유럽 한국 카톨릭 학생회가 발족하는 중요한 분깃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는 1972년 최초 연합교회가 출발이다. 연합교회의 명칭처럼 교파를 초월해 공동체가 운영되었고, 이후 ‘재불 한국인 기독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파리 경찰청에 정식으로 협회 등록해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시기 마찬가지로 연합회 예배에는 한국의 각 교파에서 파견된 목사들이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했다.
불교는 너무나 유명한 [무소유] 저자인 법정 스님이 1991년 프랑스 방문을 계기로 재불 불자들의 의지와 법정 스님의 발원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다.
당시는 프랑스 수도원에서 수행하던 향적 스님과 영국 연화사에서 법회를 지도하던 지수 스님의 지도로 파리 시내에서 정기적으로 법회를 가졌다.
이후 한국에서도 파리에 길상사 건립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1993년 7월 파리에서 동쪽으로 25Km 떨어진 토르시에 길상사를 세웠다.
원불교 역시 ‘원불교 프랑스 교동 우의회’라는 이름으로 1991녀에 최초로 법회를 개최했다. 1993년 파리 경찰청에 정식으로 등록하여 종교 문화활동을 펼쳤고 이듬해 장티이 콩도르세가 6번지에 교당을 매입해 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밖의 프랑스 한인 단체
대표적인 한인단체는 ‘한인과학기술협회’, ‘한불상공회의소’, ‘소나무작가협회’, ‘재불청년작가회’, ‘한불언어문화교육자협회’, ‘재불영화학회’ 등이 있다.
‘한인과학기술협회’는 1976년 출범한 비영리사단법인으로 한국의 과학기술계와 유대를 강화하고, 한국과 프랑스 양국간 과학기술 교류에 기여하기 위해 출범되었다.
초기에는 유학생 중심이었지만 프랑스에 정착하는 학자들이 많아 지면서 현지 교수 및 전문 연구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014년부터 교민자녀들을 대상으로 수학경시대회를 열고 있다.
‘소나무작가협회’는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25명의 한국인 작가들이 모여 1992년에 옛 국방부 탱크 정비공장을 임대받아 작업 아틀리에를 개관하면서 창립되었다.
외국 작가들과 집단 작업을 함께 하며 프랑스와 한국간 문화교류에 중요한 역할 하고 있다.
프랑스 한인 100년사를 맺으며
프랑스의 한인 역사는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파리 만국박람회 참석의 필요로 인해 임시정부수립을 앞당기게 한 역할은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만 하다.
또한, 우리 미술사에도 프랑스 유학을 통해 근대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럽한인 100년사를 정리하며 중요하지 않은 나라가 없겠지만 1800년대 말과 현재에 이르기 까지 유럽의 관문으로 프랑스는 유럽 전체 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 자료출처 【유럽한인 100년의 발자취】, 유럽한인총연합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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